철학 및 글짓기

푸코의 규율 권력과 생체 권력, 판옵티콘과 시놉티콘의 문제점

치킨먹고싶어요 2022. 5. 30. 15:43

감옥


 . 판옵티콘으로 대표되는 규율 권력에서 반 규율권력인 시놉티콘으로


미시적으로도 자유를 억압한다.


푸코는 우리의 자유를 길들이고 억압하는 권력이 거시적일 뿐만 아니라 미시적으로도 일어난다고 생각한 철학자입니다. 여기서 거시적이란 눈앞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청와대국회 등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병원, 학교, 감옥 등도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푸코는 직감합니다.


규율 권력: 감옥을 예로써


그중에서 푸코가 예로 드는 감옥을 살펴봅시다. 처음에는 감옥에 갇힌 수감자는 교도관들에게 감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교도관이 감시할 때만 행동을 다르게 합니다그런데 행동을 특정 상황이 올 때마다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너무나 힘듭니다. 그래서 곧 수감자는 교도관이 감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타인의 입장, 규칙, 규율에 의해 자기 스스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일은 감옥에 수감 중인 사람뿐만 아니라, 미시적 억압 기관을 통해 현대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학생은 교복을 단정히 해야 한다.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선생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아버지 말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같은 말이 우리의 행동을 검열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를 형성하는 것은 나라고 생각하는 통념과 달리, 보이지 않는 규율이 우리를 형성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푸코는 규율 권력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규율 권력의 상징판옵티콘


이러한 규율 권력은 판옵티콘으로 상징됩니다. 이는 효과적 감시를 위한 원형감옥으로 항상 존재하며 대중을 철저하게 감시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항상 감시를 받고 있다는 의식을 갖게 하는 ‘규율 권력’의 상징입니다. 이를 비유에 사용하여 현대는 전자 판옵티콘의 사회라 불려지는데 CCTV, 위치추적, 생체인식과 같이 IT기술의 발달로 사소한 움직임조차 시공간을 초월하여 수집,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반 규율권력의 상징: 시놉티콘


이러한 전자 판옵티콘의 사회를 걱정했던 소설가인 조지 오웰은 빅 브라더가 항상 감시하여 모든 것을 검열하는 소설인 1984를 썼습니다. 규율 권력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발전하여 더욱더 강해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남준은 이런 오웰과 생각을 반박합니다. 그의 작품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권력기관이 쓰는 무기는 우리도 사용하여 권력기관을 감시, 견제할 수 있다고 니다. 예를 들자면 이집트에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사람을 광장에 모은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언론과 통신을 통해 대중이 소수 권력자를 감시하는 것을 시놉티콘이라고 하여 사회를 수평적 구조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시놉티콘의 단점과 고려해 봐야 할 


그러나 시놉티콘에 대하여 정말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권력기관의 무기를 권력에게 사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몰래카메라 같은 것으로 사생활 침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런데 시놉티콘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애매하게 나타내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하지 않은 사람, 노인 공경을 안 하는 사람, 막말을 하는 사람 등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 같아서 좋은 것 같기도 한데 사회 정의를 남용하고 가해자 신상을 무차별적으로 유포하는 것 같아서 나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고려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자가 아닙니다. 이러한 일은 절대로 우리보다 권력자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부한 도덕윤리를 갖다 대며 너무 가차 없이 동영상의 가해자를 매도합니다. 그래서 짧게 편집되어 우리는 전후 사정을 모른다는 것과, 너무 진보한 윤리를 들이대며 사이버 왕따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우리가 정말 권력자가 이런 행동을 했더라도 이 정도로 화를 냈는지를 자기 성찰해야 합니다.


판옵티콘과 시놉티콘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작용, 그리고 나아가야 하는 길         


이렇게 규율 권력에서의 판옵티콘과 시놉티콘을 알아보았습니다. 판옵티콘의 사회는 우리를 항상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자기 검열을 하게 한다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놉티콘 사회는 권력기관을 감시, 견제하는 장점도 크지만, 사생활 침해 같은 단점과 사이버 왕따같이 고려해 볼 점이 많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판옵티콘을 극복하고시놉티콘은 양날의 검으로 사용될 수 있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논의해야 합니다.


. 현대사회의 생체 권력


생체 권력


한편 생체 권력이란 성의 역사에서 종으로서의 신체, 즉 증식, 출생률과 사망률, 건강 수준, 수명, 장수와 더불어 그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서 이들에게 개입하고 이를 조절하는 통제 전체, 다시 말해 인구의 생체-정치” 정의됩니다. 이는 현대에 나온 개념인데 과거에는 시민(백성)들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과거 시민은 단지 처형당함으로 군주의 권력을 과시하게 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오면서 시민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노동력이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를 오래 계속 일하 도록 의학이 발달하고, 의학을 효율적으로 노동자의 삶에 개입하기 위해 통계학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국가가 인구관리를 하기 위해서 의학과 통계학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야기했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유야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의학과 통계학에게 도움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국가는 모든 생명을모든 인간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인종성별나이계층과 계급에 따라 의료보험기준이나 국가가 관리하는 취급 정도가 달라지는  문제입니다.


생체 권력의 예시: 조에 비오스


위와 같이 생명을 평등하게 보지 않고 특정 기준에 따라 나누었던 과거의 사례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정치적 존재는 조에 정치적 존재를 비오스 부른 사례입니다. ‘조에 ‘비오스’ 간의 계급 차이는 엄청났기에 설령 자신이 비오스라도 언제든지 자신이 조에 되돌아가는 불안감을 느껴 자신을 검열하게 됩니다. 마치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약해 보이는 아이를 왕따 시키는 아이들처럼 말이죠. 그래서 생체 권력은 자기 스스로 조에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한없이 검열하고 국가가 원하는 권력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자발적 복종을 하게 하는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생체 권력에 맞서서 비오스로의 유혹에서 벗어날  있어야  것입니다. 그러면 권력으로부터 당당한 주체, 삶의 권력을 긍정하는 주체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