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의 시작
"산소포화도 80%, 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저는 아나필락시스 환자입니다. 응급실을 오가며 느낀 경험은 제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습니다.
처음 아나필락시스를 경험한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평범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입술이 붓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네" 정도였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혀가 부어오르고, 목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숨을 쉬려고 해도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습니다. 그때 모니터에 찍힌 산소포화도 수치가 80%대. 정상이 95% 이상인 걸 생각하면, 제 몸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번 응급실을 오갔고, 매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습니다. 이 경험은 제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군 복무도 현역이 아닌 사회복무요원으로 이행하게 되었고, 항상 에피네프린 자가주사기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나만 이런 걸까"라는 생각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 하나의 질문
"만약 내가,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 미리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이 질문이 건강 정보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 계기였습니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아나필락시스가 뭔지 미리 알았더라면, 첫 증상이 나타났을 때 더 빨리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에피네프린 주사 방법을 알았더라면, 내가 그렇게 위험한 상태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질문들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정확한 정보 하나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아나필락시스뿐만이 아닙니다. 심폐소생술을 알았더라면 살릴 수 있었던 생명, 감염병 예방법을 알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질병. 건강 정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건강 정보를 전달하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고통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요.

지식과 실천 사이의 간극
"방법은 아는데, 막상 손이 안 나간다."
2023년 안전 홍보단 활동 중, 시민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저는 2023년에 청소년 안전 홍보단 단장과 캠퍼스 안전지킴이로 활동했습니다. 심폐소생술 교육, 안전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많은 시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방법은 아는데, 막상 손이 안 나간다"였습니다.
심폐소생술이 중요하다는 건 대부분 알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웠다는 사람, 회사에서 교육받았다는 사람, 뉴스에서 봤다는 사람. 하지만 "실제로 해본 적 있으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고개를 저었습니다. "무섭다", "잘못하면 어쩌지", "내가 해도 되는 건가" 같은 두려움이 앞섰다고 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요. 아무리 좋은 정보를 알려줘도, 사람들이 실제로 행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지식과 실천 사이에는 생각보다 깊은 간극이 있었고, 그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가 제 고민이 되었습니다.

제가 가진 두 가지 무기
데이터분석학 전공 + 환자로서의 경험
국민소통단 활동을 시작하면서, 저는 제가 가진 두 가지를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학부에서 컴퓨터공학과 데이터분석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경영정보학(MIS) 석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이터를 다루고, 숫자로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연구 논문을 찾아 읽고, 통계를 해석하고, 그걸 쉬운 말로 풀어내는 게 제 전공이니까요.
그리고 저에게는 또 하나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환자로서의 경험입니다. 아나필락시스로 응급실을 오간 경험,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순간들. 이건 어떤 교과서에서도 배울 수 없는, 오직 저만이 가진 이야기입니다.
딱딱한 정보를 전달하는 대신, 데이터의 설득력과 경험의 진정성을 결합해보기로 했습니다. 데이터는 "왜 이게 중요한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고, 경험은 "이게 실제로 어떤 건지"를 감정적으로 와닿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달의 방식을 바꾸다
단순히 "손을 씻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누로 30초 손씻기, 바이러스 99.9% 제거"라고 말하는 것.
어떤 게 더 와닿으시나요?
저는 WHO, CDC 연구 데이터를 인용해서 구체적인 숫자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손씻기의 날 콘텐츠를 준비하면서 미국 CDC의 실험 결과를 찾았습니다. 물로만 10초 헹구면 바이러스 제거율이 23%에 불과하지만, 비누로 30초 씻으면 99.9%가 제거된다는 데이터였습니다.
이 숫자 하나가 "손 씻으세요"라는 말보다 훨씬 강력했습니다. 왜 30초여야 하는지, 왜 비누를 써야 하는지가 숫자로 명확하게 설명되니까요. 막연한 권고가 아니라 과학적 근거가 있는 행동 지침이 되는 거죠.
또한 "키보드에 화장실 변기보다 5배 많은 세균이 있다"는 데이터를 보여주면, 사람들이 실제로 키보드를 닦기 시작합니다. 데이터는 추상적인 위험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주고, 그게 행동 변화로 이어진다는 걸 배웠습니다.

데이터가 가진 설득의 힘
'세계 손씻기의 날' 콘텐츠를 준비하며 Cochrane Review의 연구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67개 연구, 100만 명 이상의 데이터를 분석한 대규모 메타분석 결과였습니다. 손씻기 교육 후 결과가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데이터였는데, 결과가 놀라웠습니다.
31% 설사병 감소
21% 호흡기 감염 감소
손씻기 하나만으로 이 정도 효과가 있다니. 장티푸스, A형간염 같은 장 감염 질환이 30% 넘게 줄고, 인플루엔자나 폐렴 같은 호흡기 질환도 20% 이상 감소한다는 거예요. 이 숫자들을 보면서 데이터분석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놀랐습니다.
경영정보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막연한 권고보다 구체적인 근거에 더 반응합니다. "손 씻으면 좋아요"보다 "손 씻으면 감염 위험이 30% 줄어요"가 훨씬 설득력 있죠.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숫자는 행동을 바꿉니다.
이 경험을 통해 앞으로도 건강 정보를 전달할 때 데이터 기반 접근을 계속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활동을 통해 얻은 것들
내 경험과 전공의 가치 발견
무엇보다 내 경험과 전공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느낀 게 가장 좋았습니다.
아나필락시스 경험은 저에게 아픈 기억이었습니다. 왜 나만 이런 걸 겪어야 하는지, 원망스러운 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그 경험을 글로 풀어내면서 오히려 정리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된다는 게 뿌듯했습니다. 아픈 경험도 나누면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데이터분석학 전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 논문 읽고 통계 해석하는 게 이렇게 실용적으로 쓰일 줄 몰랐어요. WHO, CDC, Cochrane Review 같은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찾아서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 건강 콘텐츠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정책에 대한 시야 확장
질병관리청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정책들이 운영되는지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습니다.
공항에서 무료로 호흡기 감염병 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아시나요? 저도 콘텐츠를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김포, 제주, 김해 국제공항에서 입국 시 호흡기 증상이 있으면 동물인플루엔자, 코로나19, 인플루엔자 검사를 무료로 받을 수 있어요.
디지털·위기소통 TF가 출범해서 인포데믹(가짜 건강정보)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국민 건강을 위해 일하는 분들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런 정책들을 국민에게 알리는 게 소통단의 역할이라는 것도 깨달았고요.

1년의 활동을 한 문장으로
"정확한 정보 하나가 생명을 지킬 수 있고, 그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 행동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국민소통단 활동을 하며 배운 가장 큰 교훈입니다.
아나필락시스 대처법을 알았더라면 더 빨리 대응할 수 있었을 생명. 심폐소생술을 주저 없이 시작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 생명. 손씻기 습관 하나로 피할 수 있었을 감염. 정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어떻게 전달하느냐도 중요합니다. "손 씻으세요"와 "비누로 30초 손씻기, 바이러스 99.9% 제거"는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힘을 가집니다. 데이터로 설득하고, 경험으로 공감하고, 작은 실천으로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 이게 제가 1년간 배운 '소통'의 방법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며
앞으로도 데이터와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실제로 읽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건강 콘텐츠를 만들어가겠습니다.
국민소통단 9기는 끝나지만, 건강 정보를 전달하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제 블로그에서, 제 주변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곳에서 계속 이야기할 거예요.
아나필락시스 환자로서 느꼈던 공포, 안전 홍보단 활동을 하며 들었던 시민들의 목소리, 데이터분석을 공부하며 익힌 논리적 사고력. 이 모든 경험이 앞으로 제가 만들 콘텐츠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제 글을 읽은 누군가가 심정지 환자 앞에서 주저 없이 가슴압박을 시작하고, 아나필락시스 증상을 알아채고 빠르게 대처하고, 30초 손씻기를 습관으로 만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활동은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의 말
한 해 동안 함께해 주신 운영사무국, 소통단원 여러분, 그리고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매달 미션을 안내해주시고, 피드백을 주시고, 응원해주신 운영사무국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덕분에 1년간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활동한 소통단원 여러분께도 감사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건강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저도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쓰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는데, 돌아보니 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발판 삼아 앞으로도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가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질병관리청 9기 국민소통단 김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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